New Document
> 문중뿌리알기 > 유적/유물

석천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박곡리 청계골에 위치하며, 문헌공 휘 원진(文憲公 諱 元振)의 제청(祭廳).

석천사

문헌공, 배위(配位)인 군부인(郡夫人) 배천조씨(白川趙氏), 인동장씨(仁同張氏), 양천허씨(陽川許氏)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
공(公)의 諱는 원진(元振), 號는 석천(石川), 고려 충렬왕 7년(1281년)에 명경문과(明經文科)에 장원급제하시었으며, 총랑(摠郞)으로 원나라에 다녀오셨고, 충선왕때 좌대언(左代言)이 되셨다.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을 역임하시고, 포산군(苞山君)의 작위(爵位)를 받으셨다.
명신록(名臣錄)에 “공은 성리학을 깊이 탐구하시고, 육경(六經)을 깊이 연해(演解)하였다” 하였으니 그 학문의 심오정치(深奧精緻)함을 알 수 있다. 충숙왕조에 문헌(文憲)이라는 시호(諡號)와 함께 충효(忠孝)의 정문(旌門)을 표(表)하도록 하였으니, 그 학문과 행실이 뛰어남을 알 수 있다.

문헌공 신도비명(文憲公 神道碑銘)

옛 高麗朝(고려조) 名臣(명신) “成均館祭酒”(성균관제주) “進賢館大提學”(진현관대제학) 郭公(곽공)의 墓(묘)는 陽智懸(양지현)(지금의 龍仁(용인)에 속함)東南(동남)쪽 30里(리) 大德山(대덕산) 西(서)쪽 기슭 申(신)西南西 (서남서)>方(방)을 向(향)한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아담하여 빼어난 明堂(명당)과 같은 形狀(형상)이기도 하다. 처음 禮葬(예장)했을 때 마땅히 碑 文(비문)이 있었을 것이나 지금은 없으니 혹 當時(당시)에 驚惶(경황)이 없어서 그랬는지. 歲月(세월)이 오래되어 雜草(잡초)에 묻혔는지. 公(공)의 後裔(후예)들이 이를 恨(한)스럽게 여겨 이르기를 “子孫(자손)이 蕃盛(번성)하여 萬計(만계)를 가득 채우는 것은 公(공)의 蔭德(음덕)임에도 不拘(불구)하고 山(산)에는 한 조각의 碑石(비석)도 없으니 어찌 後孫(후손)을 가르치겠는가”하고 마침내는 碑石(비석)을 세워 不肖(불초)한 내가 적고자 한다.
嗚呼(오호)라 墓文(묘문)은 阿諛(아유)함을 賤(천)하게 여기고 事實(사실)을 貴(귀)하게 여기는 것이라. 事實(사 실)을 따르고자 하니 生卒(생졸)이 分明(분명)하지 않고 履歷(이력)은 詳細(상세)히 考察(고찰)하기에 不足(부족) 하며 阿諂(아첨)을 쫓으면 없는 것을 억지로 끌어대야 하니. 내가 不肖(불초)하여 公(공)을 위해 이 붓을 드는 것이 眞實(진실)로 어려우나 그만두지 않을 진데 차라리 簡略(간략)하게 적고자 할 따름이다.
公(공)의 諱(휘)는 元振(원진)이시고 號(호)는 石川(석천)이시며 玄風(현풍)에서 나셨다. 玄風(현풍)의 옛 이름은 苞山(포산)이다. 上祖(상조) 苞山君(포산군)의 諱(휘)는 鏡(경)이시며 本來(뻔? 中國(중국)분으로 中國勢力下(중 국세력하)에 있던 高麗國(고려국)에 벼슬하러 나오셔서 “金紫光祿大夫門下侍中平章事”(금자광록대부문하시중평 장사)를 지내셨고 封邑(봉읍)을 “苞山”(포산)으로 받아 이를 本貫(본관)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公德(공덕)이 이어져 마침내 東方(동방)의 名望(명망)높은 家門(가문)이 되었다.

曾祖父(증조부)의 諱(휘)는 基正(기정)이시며. ‘吏部尙書’(이부상서)를 지내셨고 ‘苞山伯’(포산백)으로 受封(수봉) 되셨으며. ‘諡號’(시호)는 “靖簡”(정간)이시다. 祖父(조부)의 諱(휘)는 膺(응)이시고 ‘門下贊成事’(문하찬성사)를 지내셨다. 考(고)의 諱(휘)는 敦孝(돈효)이시며 ‘密直副使’(밀직부사)를 지내셧고. 安東金氏(안동김씨)를 아내로 맞이하여. 主簿(주부) 金熙之(김희지)의 집에서 公(공)을 낳으셨다. 公(공)은 그 名聲(명성)이 크게 뛰어나 삼가 高麗史(고려사)에 의거 살펴본다.

公(공)은 忠烈王(충열왕) 7年(년) 辛巳(신사) 1281年 12歲(세)의 少年(소년)으로 ‘明經文科’(명경문과)에 “壯元及 第”(장원급제)하시었으며 同(동) 王朝 (왕조)에 ‘摠郞奉使’(총랑봉사)로 元(원)나라에 다녀오셨고 忠宣王朝(충선 왕조)에 ‘左代言’(좌대언)이 되셨다. ‘大東韻玉’(대동운옥)에 “集賢提學”(집현제학)이라 하였고 ‘與地勝覽’(여지승 람)에 “成均館祭酒通憲大夫進賢館提學”(성균관제주통헌대부진현관제학)이라 하였으며. ‘東史寶鑑’(동사보감)에 “進賢館大提學苞山君”(진현관대제학포산군)이라 하였으니 以上(이상)이 公(공)의 主要(주요) 官歷(관력)이시다.

‘名臣錄’(명신록)에 ‘性理學’(성리학)을 깊이 探究(탐구)하시고. 六徑(육경)을 깊이 演解(연해)하였다 하였으니 그 學問(학문)의 深奧精緻(심오정치)함을 알 수 있다. 忠肅王朝(충숙왕조)에 “文憲”(문헌)이라는 ‘諡號’(시호)를 下賜 (하사)받으셨고 “忠孝”(충효)의 “旌門”(정문)도 받으셨으니. 그 學問(학문)과 行實(행실)이 뛰어남을 알 수 있다.

金潛谷(김잠곡)의 ‘類苑叢寶’(유원총보)에 “郭某(곽모)는 베풀기를 좋아하여 16歲(세)에 太學(태학)에 居(거)할 때 한 선비가 몹시 가난하여 그의 父祖(부조) 以上(이상) 五歲(세)를 葬事(장사)지내지 못하였으므로 와서 도움을 구하자 公(공)이 아낌없이 주면서도 姓名(성명)을 묻지 않았다” 하였다. 公(공)의 人品(인품)과 度量(도량)이 이와 같이 크고 寬厚(관후)하였으니 어찌 감히 한 글자라도 妄靈(망령)되이 加筆(가필)하여 지나치게 美化(미화)하였다 는 非難(비난)을 自招(자초)할 수 있겠는가.
公(공)은 三娶(삼취)를 하시였는데 모두 “郡夫人”(군부인)에 封(봉)해졌다.
初配(초배)는 ‘白川趙氏’(백천조씨) 評理(평리) 趙雲卿(조운경)의 따님으로 그 墓(묘)는 失傳(실전)되었고 ‘仁同張 氏’(인동장씨) 別將(별장) 張元佑(장원우)의 따님은 그 墓(묘)를 合?(합폄)하였으며. ‘陽川許氏’(양천허씨) 許文華 (허문화)의 따님도 그 墓(묘)를 지키지 못하였다.

아들 둘을 두셨는데 장자(長子) ‘忠寬’(충관)은 “太中大夫尙書左丞”(태중대부상서좌승)을 지냈고 ‘安東金氏’(안동 김씨) 樂安君(낙안군) 金之謙(김지겸)의 따님을 아내로 맞았다. 次子(차자) ‘忠敬’(충경)은 “兵部尙書”(병부상서) 를 지냈다. 딸 둘을 두셨는데 長女(장녀)는 ‘安東金氏’(안동김씨) 密直副使(밀직부사) 金?(김천)에게 시집가서 아 들 士謙(사겸). 士廉(사염). 士安(사안). 士衡(사형), 넷을 두었는데 모두 淸官(청관) 顯職(현직)에 올랐다. 次女(차 녀)는 全州(전주) 崔氏(최씨) ‘保勝郞’(보승랑) 崔佺(최전)에게 시집가서 아들 ‘正臣’(정신)을 두었는데 ‘中郞將’(중 랑장)이 되었다.

忠貫(충관)의 아들 ‘郛’(부)는 忠肅王朝(충숙왕조)에 “推忠翊戴(추충익대) 佐理功臣(좌리공신) 壁上三韓三重大匡 守司徒都僉議事”(벽상삼한삼중대광수사도도첨의사)를 지냈고 “苞山君”(포산군)으로 ‘襲封’(습봉)되었으며 ‘諡號’( 시호)는 “忠簡”(충간)이시고. ‘忠孝’(충효)의 ‘旌門’(정문)을 下賜(하사)받았다. 順興安氏(순흥안씨) 文順公(문순공) 安遷(안천)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이 분이 文成公(문성공) 裕(유)의 孫女(손녀)이시다. 모두 네명의 아들 을 두었는데 長子(장자) ‘居仁’(거인)은 “典理判書”(전리판서)를 次子(차자) ‘游義’(유의). 三子(삼자) ‘遊禮’(유예) 는 모두 “典工判書”(전공판서)를 季子(계자) ‘游信’(유신)은 “工部判書”(공부판서)를 各各(각각) 지냈다.

그 後孫(후손) 가운제에는 어진 분이 적지 않으니 ‘亨院’(형원)한 분이 府使(부사) 都(도), 監司(감사) 湖(호), 司諫 (사간) 宗元(종원), 掌令(장령) 宗藩(종번), 執義(집의) 漢哲(한철), 佐郞(좌랑) 期壽(기수), 僉正(첨정) 興懋(흥무) , 生員(생원) 瀚(한), 應敎(응교) 天衢(천구), 僉樞(첨추) 維藩(유번), 參奉(참봉) 山晉 (진),, 士人(사인) 后泰(후태) 등 열두분이고. ‘立?’(입근)한 분(節義(절의)를 지켜 목숨을 버린 분)이 司直(사직) 受成(수성), 進士(진사) 壽岑 (수잠), 防禦使(방어사) 嶸(영), 郡守(군수) 崙(윤), 承旨(승지) 邦郁(방욱), 都事(도사) 載祥(재상), 士人(사인) 仁 孫(인손), 康華(강화)등 여덟분이고. ‘策勳(책훈)된 분(功勳(공훈)이 史書(사서)에 기록된 분)이 節度使(절도사) 自安(자안), 習讀(습독) 連城(연성), 主簿(주부) 好禮(호례), 佐郞(좌랑) 仁居(인거), 府使(부사) 邦鍵(방건), 宣傳 官(선전관) 宗文(종문), 郡守(군수) 止善(지선), 主簿(주부) 應龍(응용), 佐郞(좌랑) ?(음), 通德郞(통덕랑) 次城(차 성), 郡守(군수) ?? (경), 司 直 (사 직 ) 信章(신장), 知樞(지추) 千重(천중), 通德郞(통덕랑) 後天(후천)등 열네분 이고. ‘敵愾’(적개)한 분(나라의 怨讐(원수)에 對抗(대항)한 분)으로는 主簿(주부) 鎭邦(진방), 獻納(헌납) 聖龜(성 구)가 있고. ‘遺逸’(유일)한 분(벼슬을 버리고 隱居(은거)한 분)으로는 參奉(참봉) 世平(세평), 處士(처사) 山+票( 진)등이 있고. ‘文學’(문학)文章(문장)으로 有名(유명)한 분>으로는 校理(교리) 天豪(천호), 察訪(찰방) 致堯(치 요), 生員(생원) 鳳齡(봉령)이 있다.

“孝行”(효행)으로 “旌門”(정문)을 下賜(하사)받은 분은 이루 다 적을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러한 事實(사실)로 미루 어 보아 작은 언덕에는 소나무와 잣나무가 나지 않고 더러운 진흙탕에서는 아름다운 玉(옥)이 나지 않음을 알 수 있으니 이는 公(공)이 본보기가 되어 後孫(후손)을 바르게 가르쳐 引導(인도)해준 때문이리라.

公(공)의 不朽(불후)함은 하늘의 三光(삼광)의 빛과 나란히 할만 할 진대. 어찌 그 남긴 香氣(향기)한 둘만 簡略( 간략)학게 역어 놓겠는가. 삼가 세 번 齊戒(제계)하고 일곱 번 沐浴(목욕)하여 銘(명)을 지어 가로되 忠(충)과 孝( 효)를 根源(근원)으로 한 公(공)의 行蹟(행적)은 누구보다도 뛰어나며 國史(국사)와 野史(야사)에서도 그 이름이 億萬年(억만년)에 걸쳐 길이 빛날 것이로다. 말갈기 같은 封墳(봉분)위에는 祥瑞(상서)로운 구름이 늘 뒤덮혀 있고 龜頭(귀두)는 세 자(尺)나 되어 藍風(남풍)이 깍아내지 못하네. 나그네가 절하고 지나가며 가로되 저 곳은 大德山 (대덕산)의 줄기요 이곳은 大(대) 賢人(현인)의 집이라고 하도다.

原碑文 : 純宗丙寅(순종병인) 嘉排立(가배립) 1926年
後孫(후손) 通訓大夫弘文館校理(통훈대부홍문관교리)知 製誥(재고) 璨(찬) 謹撰(근찬)
新碑文 : 東國大學校(동국대학교) 敎授(교수) 文學博士(문학박사) 韓容洙(한용수) 謹撰(근찬) 後孫후손) 22代 瑞欽 前面碑文謹書(전면비문근서)
再建立 推進委員長(재건립 추진위원장) 炳起

문헌공 휘 원진조 세계표

始祖 경 2世 헌3世 림4世 연5世 기정6世 응7世 돈효8世 원진
문헌공의 새신도비 2003년 10월 2일

석천재

새로 중건된 대덕사 옆의 석천재

석천사

대덕사 증축에 이어 2010년 나란히 세워진 석천사, 뒤로 문헌공묘소가 보인다

舊 재실(齋室)
 
구 문헌공묘소와 석물

지도

경기도 용인시 백암면 박곡리 청계골 (대덕사 옆)
지도 크게 보기
2012.10.31 | 지도 크게 보기 ©  NHN Cor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