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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7년(숙종 33)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청백리 휘 안방(淸白吏 諱 安邦), 연일당 휘 지운(燕日堂 諱 之雲), 만심재 휘 규(晩尋齋 諱 赳), 탁청헌 휘 황(濯淸軒 諱 ?)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
선현(先賢) 배향(配享)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던 것을 1954년에는 사당을, 1982년에는 동·서재를 건립하였다. 이 서원에서는 해마다 음력 2월과 8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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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향인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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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3世 청백리(淸白吏) 휘 안방(安邦)
선생의 字는 여주(汝柱)이며 의영고사 휘 득종(義盈庫使 諱 得宗)선생의 아들이다.
선생은 세종 때에 해남현감(海南縣監), 익산군수(益山郡守)를 역임하고 봉열대부(奉列大未)에 올랐으며 1467년(세조 13)에 이시애 난에 군공(軍功)으로써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오르고, 청백리(靑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선생은 무과로서 벼슬에 올랐으나, 교류한 선비들이 당대의 명류(名流)들이었으며, 또한 선생이 관직에 있을 때 청백함이 빙옥(氷玉) 같아서 왕래할 때 단기필마로서 행장이 표연하였다 한다. 점필재 김종직(?畢齋 金宗直) 문인이다.
선생이 일찍이 익산(益山)에서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다가 종자가 한 쇄철을 차고 있음을 보고 깜짝 놀라 말하기를 '관가의 물건에 크고 작음이 무엇 다르랴'하고 관에 돌리도록 하였으니 그 깨끗함이 이와 같았다.
2)16世 연일당(燕日堂) 휘 지운(之雲, 1498~1551)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으로 연일당공파(燕日堂公派)의 파조이며, 字는 여우(汝雨), 호는 연일당(燕日堂)이며, 청백리 휘 안방(安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휘 승양(承陽)이고, 아버지는 휘 평(坪)이며, 어머니는 교리 박문간(校理 朴文幹)의 따님이다. 1524년(중종 1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관직은 예조·이조좌랑(禮曹 吏曹佐郞)과 안음현감을 역임하였으며, 학행과 문장이 탁월하여 세인들이 마음(心), 얼굴(貌), 문장(文)이 옥과 같다하여 삼옥당(三玉堂)이라 불렀다.
3) 17世 탁청헌(濯淸軒)휘 황( ?)(1518~1569)
字는 경정(景靜), 호는 탁청헌(濯淸軒), 탁청헌공파 파조(濯淸軒公派 派祖)이다.
조부는 歸厚署別提(귀후서별제) 諱 ?(휘 거)이시고, 부친은 進士 諱 之貞(휘 지정)이며, 모친은 영월엄씨 忠順衛 漢伯(충순위 한백)의 따님이시다.
탁청헌께서는 조선조 중종 경인년(서기1530년)에 率禮(솔례)에서 태어나시고, 어려서 단아하고 聰明(총명)하였다. 從叔 吏郞公( 종숙 이랑공= 연일당 휘 지운)에게 수학했는데 吏郞公이 자주 칭찬했다. 자라서 모친의 명으로 과거공부에 종사하여 명종 병진년(서기1556년)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시었다.
1563년에 禮曹佐郞(예조좌랑)으로서 외직으로 나가 禮安縣監(예안현감)으로 부임하여 선정을 펴고 退溪 李滉先生(퇴계 이황선생)의 문하와 從遊(종유)하며 도덕과 의리를 갈고 닦아 성현의 가르침을 實踐躬行(실천궁행)하여 先生으로부터 推重(추중)하고 許與(허여)함은 물론 백성들로부터 큰 신망을 받았으며, 咸陽郡守(함양군수)로 재직 중 선조 기사년(1569년) 1월 14일에 40세의 나이로 큰 뜻을 펴보시지 못하고 별세하셨다.
퇴계선생께서는 “백성들이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를 그리워하듯 하였다”는 시구와 “공은 세상에 드러난 선비요,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다”라는 직접 제문을 지어 주고 弟子(제자)들에게 弔喪(조상)하게 하였다.
탁청헌선생실기에 의하면 각종 兵?(병선)으로 典籍(전적)이 燒失(소실)되어 전하는 것이 거의 없으나, 퇴계선생의 문집과 師友錄(사우록) 등의 기록에 의하여 선생의 인품과 행실을 알 수 있다. 또한 후세 사람들이 玄郭八走(현곽팔주)의 한사람으로 推仰(추앙)하며,
4). 17世 만심재(晩심齋) 휘 규( 赳, 1521~1584)
심(竹+尋)字는 극정(克靜). 호는 만심재(晩尋齋). 참의공파 파조(參議公派 派祖).
1546년(명종 1) 식년 생원시 1등합격(式年 生員試 一等合格), 1555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시고, 내직으로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홍문관(弘文館)에서 벼슬을 하고, 외직으로 진주(晉州), 순천(順天), 광주(光州), 안동(安東), 안변(安邊), 동래(東萊)등 6주(六州)의 지방관을 역임하였고, 호조참의(戶曹參議), 승지(承旨) 역임 후 학문에 심취하였으며, 이양서원(尼陽書院)에 그의 유고(遺稿)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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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축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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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의 배치는 강당(講堂)과 외삼문이 강학공간의 축을 형성하고 있으며, 강당 우측으로 대지를 한단 높여 내삼문과 사당이 자리하도록 하여, 전체적으로 좌학우묘(左學右廟)의 배치를 하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인 청백사(淸白祠)와 내삼문, 강당인 경렴당(景廉堂)과 외삼문인 존도문(尊道門) 등이 있다. 강당 오른편에는 청백사(淸白祠)로 불리는 사당이 있다. 그리고 사당 우측에 관리사와 장판고를 두었다. 서원의 동쪽에는 고직사가 별도의 일곽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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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양서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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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목 : 문화재자료 32호
지정번호 : 0032-00-00-22
문화재명 : 이양서원 (尼陽書院)
분류 : 서원(부동산)
수량 : 일곽
지정일 : 1995-05-12
소재지 : 대구시 달성군 현풍면 대리 907-3 일대
소유자 : 이양서원
관리자 : 이양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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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대리
새주소: 달성군 현풍면 삼강1길 지번주소:달성군 현풍면 대리 667-2
현풍 I.C에서 진주 방면으로 67번 도로이용 → 현풍 곽씨 십이정려각을 지나 → 마을회관옆 정미소에서 200m
거리에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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