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入鄕顯祖 郭 海 先生 (1958년 戊戌普 수록 내용)
初諱桓號乾止堂 文憲公 元振 玄孫 恭愍王朝 官司온同正左右保勝中郞將 麗史備略曰 恭愍王朝 左右保勝郞將郭海年
二十三 襲父爵爲摠管中郞將 辛巳 哈丹之亂 與趙之璘同進于永安道龍津 勝捷獻 於朝 時年二十五 王大奇之 賜金袍
玉帶曰 汝未有室服 此歸娶生嘉子 世世致力於王室 如汝之於朕也 及丙申 仲孚之亂召命拜都摠司部領 趙小生林原巨
趙天住 出戰于雙城和州和北 九月之間 擊走勝捷 仍留西京 掃蕩紅巾殘賊十二城鎭 以軍功超授守司寇密直使柱國三
重 封海美君 麗運告訖 與圃隱鄭先生 圖扶國맥 圃隱立槿太祖龍興 遂懷不二之志 遯于光州之召古龍坊 依山爲幕而
居之 一片丹心不忘舊國之恩 遇且구一堂于附近山上扁之以乾之乾之盖取諸乾乾不息 知其所止之義 日日登臨望北號
慕 終身不懈 時有人來請學子 公常自謙而言曰 余亡國之大夫不可以訓 迪人子弟云 後人高景之名其山曰 乾止號其洞
曰 山幕乾止稱其公之肯堂于山扁之以乾止之義 山幕指其公之來胥始依山爲幕之意 其山與洞之稱名 皆由於公之遺蹟
而至今不切於此可以知公之節行 白世而不朽 墓 光山郡林谷面山幕洞乾止山甲座 配郡夫人濟州高氏父司온直長坪 墓
合不부有碣床石 後孫孟奎撰碣銘 子思安見下 思寧見夜 女李自寶咸豊人 精勇郞將 子李克明李克諧 咸城君林碩住羅
州人 贈軍器寺正 子林貴椽贈戶曹參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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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이름은 桓이고 호는 乾止堂이다.
고려 중반의 대문호 進賢館大提學 文憲公 元振(八世)의 玄孫으로 공민왕조에 벼슬이 사온동정좌우보승중랑장으로
麗史備略에 이르기를, 공민왕조에 좌우보승랑장 郭海는 나이23세에 아버지의 벼슬을 세습하여 총관중랑장이 되었다.
신사 거란(哈丹)의 난에 조지린과 함께 영안도 용진에 나아가 싸움에 이기고 조정에 승첩을 고하니,이 때 나이 25세
였다.
왕이 크게 기이하게 여겨 金袍와 玉帶를 하사하며 이르기를 “너는 아직 장가가지 않았으니, 이제 혼인하여 훌륭한
자식을 낳고, 대대로 왕실에 힘을 다하기를 네가 짐에게 하는 것 같이하라.”하였다.
병신년 仲孚의 난에 명을 받아 도총사부령직을 제수 받았다. 조소생, 임원거, 조천주와 쌍성 화주 화북 九月山사이에
출전하여, 적을 크게 이기고, 西京에 계속 머물면서 12城鎭의 紅巾잔적을 소탕하였다. 그 군공으로 초수수사구밀직
사주국삼중의 직책을 제수 받았다.
圃隱 鄭선생과 함께 국맥을 도모하다가, 圃隱이 태조의 龍興에 반대하다 목숨을 잃으니, 끝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뜻을 품고 광주의 소고룡방이라 불리는 곳에 숨어서 산에 막을 치고 살았다.
일편단심 舊國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산정상 부근 건지(西北方을 등진 방향)에 집을 얽고 살았으며 乾之는 부지런하여
쉬지 않는 다는 것을 말함이니 건지라 칭한 뜻을 알겠다. 매일 산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고 사모하기를 죽을 때까지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때 당시 주위의 사람들이 배우기를 원했으나 그는 항상 겸손하여 말하기를 “나는 망국의 대부이니 남의 자녀를
가르칠 수가 없다.” 하였다. 후인 고경지가 그 산을 이름하여 건지라 하였고, 그 마을을 산막이라 하였다.
건지는 공의 집이 산의 건지방향인 뜻이고 산막은 공이 와서 처음 산에 막을 지은 뜻을 가리킨다.(衣山爲幕) 그 산과
마을의 명칭이 모두 공의 유적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으니 가히 공의 절행이 백세에 이르기까지 잊혀지
지 않을 것이다.
묘는 광산군 임곡면 산막동 건지산 갑좌이고, 배는 郡夫人제주고씨(司온直長 坪 女)로 합장되어 있으며 비갈과 床石
이 있다.
후손 孟奎가 갈명하고 撰하였다. 아들은 思安, 思寧 형제분이며 큰딸은 李自寶(함풍인 정룡랑장)에게 시집보냈다.
외손은 이극명, 이극해 이며 둘째사위 함성군 林碩住(나주인)는 군기사정에 추증 되었고, 외손 임귀연은 호조참판에
추증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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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二世 諱 海의
長子, 思安은 孫 謙山 曾孫 益晋, 滋貞으로 이어지고
益晋은 中郞將公派의 派祖 諱
奉訓郞行禮賓侍主簿를 지낸 主簿公派의派祖 諱 儀를 낳으시고
滋貞은 星州목사를 지내고 牧使公派의 派祖 諱 保君을 낳으셨다.
次男 思寧은 孫 宜山 曾孫 茂貞으로 이어져서
參奉公派 派祖 諱 球
참봉벼슬을 지낸 敬隱公派 派祖 諱 琳
효행으로 계공랑 광릉참봉에 제수된 啓功郞公派 派祖 諱
三兄弟분을 낳으시니 호남의 大문벌 山幕洞 五代문중을 거느리게 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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郭 海 墓
郭海는 八世 文憲公 進賢館大提學 元振의 玄孫(高孫 = 四代孫)으로, 初名은 桓이고, 號는 乾止堂이다.
麗史備略에 가로되 恭愍王朝에 左右保勝中郞將 郭海는 23세때 襲父爵位로 벼슬길에 나간 후 辛巳年 哈丹之亂에 趙
之璘과 더불어 平安道 龍津에서 크게 이겨 捕虜를 朝廷에 바치니 그때 나이 25歲였다. 王이 크게 기뻐하여 金袍玉帶를
내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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油然齋 懸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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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油然의 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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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같은 것이 구름처럼 왕성하게 일어나는 모양으로 저절로 일어나 형세가 왕성함을 일컫는 말이니,
“후손이 瑞氣가 왕성한 구름을 타고 일어남을 뜻함이니 후손 모두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재실 명칭 油然齋가
아닌가”
본 자료는 광주.전남대종회 1호 회보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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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申年 仲孚之亂에 都摠司部領 趙小生 林原臣 趙天柱와 함께 出戰하여 雙城, 和州, 和北, 九月之間에서 敵을 크게
이기고 繼續 西京에 머물며 紅巾殘賊을 十二城에서 鎭壓하니 그 軍功으로 超授守司冠密直使 柱國三重의 벼슬을
받으셨다. 高麗의 運이 다함에 圃隱 鄭先生과 더불어 國脈을 붙잡고자 하였으나 李太祖 龍興에 不二의 뜻을 품고
光州 召古龍坊에 隱遁하며 依山爲幕하고 一片丹心 不忘舊國之恩遇로 日日登臨하여 亡北號幕하고 終身토록 부지
런하였으니 주위의 사람들이 배우기를 願했으나 公은 항상 謙遜하여 一言之下로 亡國의 大夫이니 남의 子弟를 가
르치는 것은 不可하다 하셨으니 後人이 그 山을 乾止山 이라 함은 公의 號 乾止堂을 이름이요. 그 地名을 山幕洞
이라 함을 依山爲幕의 뜻이로다. 그 山과 그 名稱이 다 公의 遺跡으로 由來한 것이니 公의 節行이 百世에 不朽할것
이라 하였다.
享祀日은 매년 三月 마지막주 日曜日이다.
油 然 齋
유연재는 포산곽씨 郭海를 추모하는 재실이다.
郭海는 초명이 환이고, 호는 건지당이며, 좌우보승중랑장을 지내신 호남 입향 현조이시다.
매년 삼월 마지막주 일요일에 향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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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광주시 광산구 산막동 원산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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