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원산 앙모재 | |
|
 |
1998년 11월 촬영 |
|
 | 神道碑銘 |
|
|
郭씨는 대대로 名望있는 家門으로서 高麗대에 널리 알려졌다. 國朝에 들어와서는 讓 瓊이 있었는에 官職은 永州(지금
永川) 知事에 이르렀다. 二代를 지나서 益山郡守 諱 安邦은 淸白吏로 名이 높았으며 경사를 쌓아 福을 열어서 能히
大業으로서 昌盛하였으니 公에게는 高祖가 된다. |
 |
그의 子는 諱 承華로서 成均館 進士였으며 孫은 諱 瑋로서
禮安縣監을 지냈다.
이분이 諱 之藩을 낳았으니 成均館司成을 지냈으며 承政院 左
承旨에 追贈되었다.同知事 許隣의 女息과 혼인하여 세 아들을
두었으니 公은 그 仲子이다. 公의 諱는 越이요 宇는 時靜으로
서 태어나 六歲時에 先夫人(어머니)께서 世上을 떠 外家에서
길러졌다. 어려서는 몸가짐이 鎭重하였고 조금 자라서는 學文
을 좋아하여 科擧工夫를 하였다. 丙午年 司馬試에 合格하였고
丙辰年에 別試文科에 登科하여 承文院 正字에 발탁 되었다.
庚申年에 母親喪을 당하였고 甲子年에 大同察訪으로 냐갔으며
丙寅年에는 榮州郡守에 올랐으며 四年을 지낸 후 官職을 버리고
歸鄕하였다. 여러번에 결쳐 大邱府使 尙州牧使 星州牧使에 敍任(서임)
되었으냐 모두 赴任하지 않았다. 司憲府 持平에 除楥되었디가
掌令으로 옮겼고 다시 司諫院司諫에 除授되었다.
戊戌年에는 義州牧使에 발탁 되었으며 通政大夫에 올랐다. 丁丑年
에 戶曹參議에 除授되었고 戊寅年에는 冬至使로 明냐라에 가
셨다가 돌아와서 黃海道 觀察使에 除授되었으나 辭讓하고
나가지 않았다.
|
|
|
辛巳年에 濟州牧使에 除授되었는에 大臣들이 公은 늙었고 濟州道는 絶海孤島라고 奏請하며 靑松府使로 바뀌었다.
乙西年에 南原府使가 되고 얼마되지않아 罷職되었다.
이듬해 병으로 玄風 率禮村의 私第에서 卒하였으니 때는 宣祖十九년 丙戌 八月六日이며 享年 六+九歲였다. 仇知山
新塘里 先代의 무덤아래에 묻혔다. 公이 大同察訪이었을때 尹元衡이 戚신으로서 임금의 寵愛를 믿고 으시대기를 심하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마치 훼역(징그러운 벌레)을 보듯이 하였다. 종이 도포를 입고 신을 신은채 계단을 오르는 것을 보고는
공이 노하여 매질을 하였더니 그 일을 들은 사람들이 통쾌하게 여겼다. 榮州郡守가 되어서는 아래 사람들을 디루기를
嚴格히 하였으나 또한 가혹 하거나 急하게 처리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외롭거냐 헐벗은 사람에게는 그 惻隱한 情을
더욱 극진히 하였다.
|
|
나라에서는 법으로 御史를 특별히 파견하여 州縣의 공문서를 뒤져서 블법이
들어나면 죄를 朝廷에 보고하여 때로는 死列을 당하기도 하였기 때문에 虎行
이라고 블렀다. 公이 하루는 堂위메 앉아 訟事를 듣고 있는데 御使 尹根壽가
갑자기 들어 닥쳤으나 公은 동요하지 않았므므로 尹公이 그 그릇에 감복하여
극찬하여 말하기를 「내가 暗行하여 州縣을살핀적이 많지만 일처리가 조용
하기를 이 사람 같이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하였다. 그때 조세를 내지
못하는 것이 한해 만석이나 되고 百姓들은 더욱 困窮케 되었는에 公이 文書
를 불사르고 耗穀(모곡)으로 보충하자 관리와 百姓이 모두 손뼉치며 춤추며 즐거워
아니하는 사람이 없었다. 離任하고 떠날 때에 이르러 公을 만류하여으나
불가능하였으므로 비석을 세워 그 뜻을 표현하여 길이 남게 하였다.
말에 있어서는 높은 산과 같이 스스로를 단속하였지마는 그 논핵함은 피할 수
없었으니 이로서 이름이 더욱 높아졌다.當初 義州는 벽지여서 百姓들이 敎化를 알지 못하였는데 公이 敎禁을 세우고 學校를 開
|
|
|
設하는데 더욱 힘을 썼으므로 百姓들이 興學碑를 세워 주었다. 그
가 南原에 있을 때 方伯이 南原府에 이르러 嬖妓로서 자신을 따르게 하였다. 公이 노하여 '이것은 나를 무시하는 것이
다. 老父가 비록 廢頹하고 方伯이 비록 貴할지라도 어쩌 娼妓를 끼고 내가 있는 府를 지나갈 수 있는가' 하고 技生의
음식은 준비하지 않았다. 方伯은 그것을 못마땅히 여긴 끝에 下等의 考課를 허위상신하였으므로 파직되어 돌아왔다.
公은 높은 기개를 지녔고 외모가 크고 호걸찼으며 눈빛이 빛났으므로 사람들이 스스로 두려워 하였다. 일처리에 뛰어
나서 판단이 마치 물 흐르듯 하였고 일처리에 임하여서는 품은 뜻이 컸으므로 관례대로 하지는 않았으냐 자신을 다스
리기를 또한 준엄하고 깨끗하게 하여 여러 군읍을 二十年이나 거쳤지만 논, 밭, 집이 늘어난 것이 없었고 자손의 將來
를 위하여 털끝만큼이라도 계책을 세우지 않았다. 따라서 조정에 들어와서는 의심사는 일이 없었으며 향촌에 처하여
서는 말썽이 생기지 않았다. 公이 만든 문장은 넓고 웅건하여 세속적인 기질이 없어 향촌에서 추천을 받은 것이 十二
番이고 上位에 든 것이 八番이었으니 한때 샤람들의 話題거리가 되었다.
활을 잘 쏘는 것도 또한 公의 천성이었다. 公務에서 물러나면 곧 과녁을 걸고 활을 쏘았는에 명중하지 아니하는것이
없었다.
|
|
|
조정에서는 公이 문무의 재주를 겸비하여 나라가 평온할 때나 위급할 때 모두 큰 일을 하겠다고 하였다. 後에 公의 아
들 再祐가 민간에서 일어나서 왜적을 격퇴하고 壬辰, 癸巳年間에 큰 공을 세워서 이름이 天下에 드러났는데 사람들은
아버지를 닮았디고 하였다. 再祐가 貴하제 됨에 따라 公에게는 자헌대부겸예조판서겸 지경연 의금부춘추관사(資憲大
夫겸 禮曹判書겸 知經筵 義禁府春秋館事)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이 追贈되었다.
공은 두 번 婚姻하였는데 첫번째 부인은 晋州姜氏로 牧使로 追贈된 諱 應斗의 女息이며 두번째 부인은 金海許氏인데
參奉 諱 瓊의 女息이었다. 公보다 十二年 後에 卒하였는데 그 葬禮는 古禮따라 첫째姜氏부인과 합장하고 許氏 부인은
墓의 左쪽에 장사지냈다. 子女는 七名의 아들,딸을 두었다. 長子는 再禧, 다음은 再錄, 다음은 再祐 즉 忘憂堂이며 다
음의‘女息은 許彦深과 婚姻하였는데 이상은 姜氏 소생이다. 다음은 再祉, 다음은 再祺 다음의 女息은 成天祚와 婚姻하였
는데 以上은 許氏 소생이다. 再禧는 固城崔氏와 婚姻하여 한 아들을 두었는데 이름은 源이다. 再祿은 咸安趙氏와 婚姻하여
세 아들을 두었는데 澧,翁,昌後이다. 再祐는 尙州金氏와 婚姻하였으니 南冥先生의 外孫女이다. 다섯 아들을 두었
으니 濚,活,灘,溟,沐 이다. 再祉는 昌寧成氏와 婚姻하여 네 아들과 딸을 두었으니, 潼,澗,河,漢 이다. 再祺는 電山申氏와 婚姻하며 두 아들을 두었으니 瀏는 生員
이었고 瀜은 著作으로 文科에 及第하였다. 公의 內外孫으로 曾孫과 玄孫은 거의 二百名에 달하였다.
公의 아들 再祺가 하루는 나에게 銘을 써 줄 것을 請하여 말하기를 '일의 내막은 잘 알 수 없으냐 先大夫께서 世上을
버리신지가 지금으로부터 四十九年이 되었습니다. 先大夫께서 名臣이었고 忘憂堂과 같은 子息이 있으면서도 장사지
냄에오히려 글이 없습니다. 萬若 銘이라도 비석에 새긴다면 그것으로 위로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四十九年이
나 지체되었지만 다행히 그대를 만났으니 그대가 뜻이 있으면 先大夫께서는 돌아가셨지만 썩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
나는 옛날목터 公의 父子와의 關係가 두터웠는데 그의 입
으로 이러한 청을 한 것이라 그리하여 감이 銘을 짓기를
郭氏의 先代는 代代로 德을 메플었으니 근원은 커서 마르
지 아니하고 뿌리는 깊이 내려 반드시 번창하리라.
公은 이러한 내림에서 태어나 백사람중에서 뛰어났다.
앞사람의 전통을 이었고 오직 그 조상을 본 받았다.
구름처럼 모여든 科學場에서 한 번 떨쳐 하늘에 떠올랐다.
우연히 나라의 그릇이 되어 오로지 郡職에 전념하였다.
형벌을 다룰 때는 엄격하게 하였고 은혜는 멀리까지 미쳐
친밀함을 더하였다.
|
 (사진: 앙모재를 참배하는 일가님께 설명하는 재호종손님) |
|
|
간사한 무리들은 설 땅이 없어지고 칭송의 노래는 사방애 넘쳐
흘렀다. 龍淵의 위에 집이 있어 浩然히 돌아왔으나 얼마 있지 않아 불려 올라가 司憲府의 높은 벼슬이 주어졌다.
|
|
머나먼 義州땅에 두 나라 國境이 닿아 있는에 行政에 地方敎育을 優先하여 近方의 風俗이 크체 바뀌었다. 戶曹에서
賦稅를 관장하였고, 中國首都에 使臣으로 행차하였다. 公과 같은 雄才 실로 藍司의 地位에 마땅한데 小人輩에게 잘못
하여 黃海道 감영을 사양하였는데 여러차례 守令을 거치고 옛집으로 물러났다. 地位는 德望에 미치지 못하였고 名聲
은 높이 올랐지만 自己의 앞길은 펴이지 않았다. 그러나 뒷끝이 흘륭했으니 누가 公을 不幸했다 하리오. 壬亂의 兇鋒을 벼락치듯
때려 부순 아드님의 功勳 世上에 赫赫하다. 나라의 恩寵이 무덤속에까지 미쳤으니 그 榮光 어디에 비기리오.
新塘의 언덕에 洛東江이 결에 있도다. 八尺의 높은 碑 지나는 사람마다 敬意를 表하도다. 내 이 銘을 새기노니 千秋萬
代 빛이 나리라.
|
|
吏曹參判 金世濂謹撰 |
본 신도비문은 단기4332년3월20일(양력5월5일) 원산의 앙모재 낙성시 종중에서 발간한 책자내용중 구 신도비
의 내용을 풀어 적은 내용으로 새롭게 각색한 신당의 신도비와는 다소 다를 수 있습니다. (2002.7 실음) |
 |
앙모재 최근 전경 (2012-2월) |
|
 | 「定庵 郭先生 神道牌」를 새로 세워 |
|
1633년(인조11년)에 세운바 있는 정암공 할아버지 신도비가 오랜
세월이 흐름에 따라 비문이 마멸되어 판독조차 어렵게 되었을 뿐 아니라, 당시로는 한길가에 세워졌
으나 근대적인 도로가 다른곳으로 축조됨에 따라 지금은 그 주변이 후미진 곳으로 변하였다.이를 안
타깝게 여긴 나머지 신도비를 새로 세우기로 하고 이를 종중의 공론에 붙인 결과, 2000. 8. 22 정암공
할아버지 신도비 건립위원회(위원장 郭鍾雨)를 출범시켰다 |
 |
 |
|
그리하여, 역사학을 전공, 망우당 할아버지에 대한 연구가 깊었던 영남대교수 김윤곤 박사께 새로 비
문을 지어줄 것을 청하였던 바, 누구나 가까이 접할 수 있는 현대문으로 마련함에 따라, 이를 이원흡(
퇴계선생 후예)씨가 써서, 새 신도비를 신당산소 주차장과 인접한 곳에 2000년 12월 29일 준공하였다.
|
|
|
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면 한정리 앙모재
연락처 : T. 616-2843
새주소 : 달성군 유가면 달창로25길 53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