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곽팔주 (玄郭八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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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에서 발행한 “대구향맥”에서 전제함)
청백리(淸白吏) 휘 안방(安邦)의 현손(玄孫) 주자(走字) 항렬(行列) 때 문호(門戶)가 크게 발천(發闡 : 열어서 드러남)하였는데 특히 세칭 현곽팔주(玄郭八走)는 삼종(三從)내의 동항지문(同行之門)이다.
* 주자항렬(走字行列)은 17世임.
□ 곽 초 (郭 超) : 자(字)는 이정(而靜)이요 호(號)는 봉촌(鳳村)이며, 선무랑(宣務郞)은 일작(逸爵)이다.
1514년(中宗 甲戌)에 증 승지 휘 지번(贈 承旨 諱 之藩)의 長子로 출생하고 어려서는 부친(父親)의 등과(登科)로 한성(漢城)에서 기거하다가 귀향하였다.
미성(未成)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及第)하였으나, 인종(仁宗)조 부마간택(駙馬揀擇)에 불응하여 파방(罷榜)되고, 그로 인하여 대과(大科)는 폐업하였으나 호학(好學)하였다. 학문과 인품이 출중(出衆)하여 임영대군(臨瀛大君-世宗大王의 4왕자)의 증손녀인 완산이씨 홍양수 완(洪陽守 玩)의 딸을 배위(配位)로 맞이하였다.
동생 감사 휘 월(監司 諱 越)과 참의 휘 규(參議 諱 赳)가 모두 문과(文科)에 급제하니 경학문장(經學文章)이 이제와 더불어 세칭(世稱) 삼대가(三大家)라 하였다. 1561년(명종 신유) 48세로 졸(卒)했다.
□ 곽 월 (郭 越) : 字는 시정(時靜)이요 號는 정암(定庵)이며, 청백리 휘 안방(淸白吏 諱 安邦)의 현손(玄孫)이다.
1518년(中宗 13)에 승지 휘 지번(承旨 諱 之藩)의 중자(仲子)로 출생하고, 1586년(宣祖 19)에 졸(卒)하였다.
어려서 몸가짐이 신중(愼重)하였고, 조금 자라서는 학문을 좋아하여 1546년(명종 1)에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56년(明宗 11)에 별시 문과(別試 文科)에 급제하여 승정원 정자(承政院 正字)로 발탁(拔擢)되었다.
그 후 대동찰방(大同察訪), 영주군수(榮州郡守), 사헌부 지평 장령(司憲府 持平 掌令), 사간원 사간(司諫院 司諫) 의주목사(義州牧使)에 제수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이어 동지사(冬至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와 1579년(宣祖 12) 황해도 관찰사(黃海道 觀察使)로 제수(除授)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 후 청송부사(靑松府使), 남원부사(南原府使)를 역임(歷任)하였다.
영주(榮州)와 의주(義州)에서는 이임(離任)후에 송덕비(頌德碑)와 흥학비(興學碑)가 각각 세워젔다. 그는 높은 기개(氣槪)를 지녔고, 외모(外貌)가 크고 헌걸찼으며, 눈빛이 빛났으므로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
한편 활을 잘 쏘는 것도 천성(天性)으로서 조정(朝廷)에서는 그가 문무(文武)의 재주를 겸비(兼備)하여 큰일을 하겠다고 하였다. 그의 셋째 아들 망우당 휘 재우(忘憂堂 諱 再祐)가 임란(壬亂)에 큰 공을 세워 귀(貴)하게 됨에 따라 그에게는 자헌대부 겸예조판서 겸지경연 의금부 춘추판사, 세자좌빈객(資憲大夫 兼禮曹判書 兼知經筵 義禁府 春秋判事, 世子左賓客)이 추증(追贈)되었다. 철종(哲宗)조에 유가면 가태(瑜伽面 佳泰), 남계서원(藍溪書院)에 제향(祭享)하였다.
□ 곽 규(郭 赳) : 字는 극정(克靜)이요 號는 만심재(晩심齋)이며, 官은 호조참의(戶曹參議)요, 청백리 휘 안방(淸白吏 諱 安邦)의 현손(玄孫)이다. * (심=竹+尋)
1521년(中宗 16)에 승지 휘 지번(之藩)의 계자(季子)로 출생하였으며, 1584년(宣祖 17)에 졸(卒)하였다.
1546년(明宗 1)에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고, 1555(明宗 10)에 文科에 급제하였다. 삼사(三司)를 지냈고, 외직(外職)으로 진주(晋州), 순천(順天), 광주(光州), 안동(安東), 안변(安邊), 동래(東萊)의 6주(六州)를 두루 거쳤으며, 호조참의(戶曹參議)와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만년(晩年)에 재사(齋舍)를 짓고, 학문에 힘썼으며, 현풍 이양서원(玄風 尼陽書院)에 제향(祭享)하였다.
□ 곽 익 (郭 익) : 字는 군정(君靜)이요, 청백리 휘 안방(淸白吏 諱 安邦)의 현손(玄孫)이다. 참봉 휘 지인(參奉 諱 之仁)의 장자(長子)로 출생하였다.
남명 조식(南冥 曺植)문하에서 수학(修學)하고, 1552년(明宗 壬子)에 문과에 급제하여 울산부사(蔚山府使)를 역임하였다. * (익= 走+翼)
□ 곽 간 (郭 趕) : 字는 원정(元靜)이요 號는 죽재(竹齋)이니, 청백리 휘 안방(淸白吏 諱 安邦)의 현손(玄孫)이다.
1529년((中宗 己丑)에 통선랑 휘 지견(通善郞 諱 之堅)의 사자(四子)로 출생하고 1593년(宣祖 癸巳)에 졸(졸)하였다.
천품(天稟)이 총명하여 18세에 문과(文科)에 아원(亞元)으로 급제하고, 승정원 정자(承政院 正字), 형조 좌랑(刑曹 佐郞)에 이어 대동찰방 겸수은어사(大同察訪 兼搜銀御使)가 되었다. 외직(外職)으로 청풍(淸風), 금산(金山), 정선(旌善), 흥해(興海), 영청(永川)郡守와 원주(原州), 공주(公州) 牧使, 강릉부사(江陵府使)를 역임하였다.
다시 내직(內職)으로 병조 정랑(兵曹 正郞), 성균관 사성(成均館 司成), 장악원 판사(掌樂院 判事), 통례원 통례(通禮院 通禮),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 종부시정 겸춘추관편수관(宗簿寺正 兼春秋館編修官) 등에 올랐다.
일찍이 낙천 배신(洛川 裵紳)의 문하에서 예학(禮學)을 공부하였으며, 동강 김우옹(東岡 金宇顒), 한강 정구(寒岡 鄭逑), 수우당 최영경(守愚堂 崔永慶) 등과 도의(道義)로 교유(交遊)하였다. 고령 월암사(高靈 月巖祠)에 제향(祭享)하였다.
* 죽재공(竹齋公)은 구지(求智) 화산서원(花山書院)에 규헌 휘 승화(暌軒 諱 承華), 예곡 휘 율(禮谷 諱 율), 괴헌 휘 재겸(槐軒 諱 再謙)과 함께 제향하고 있음.
□ 곽 황 (郭 趪) : 字는 경정(景靜)이요 號는 탁청헌(濯淸軒)이며, 청백리 휘 안방(淸白吏 諱 安邦)의 현손(玄孫)이다.
1530년(中宗 25)에 진사 휘 지정(進士 諱 之貞)의 차자(次子)로 출생하였다.
1556년(明宗 11)에 별시 문과(別試 文科)에 올라 을과(乙科) 일인으로 급제하였으며, 예조 좌랑(禮曹 佐郞), 예안 현감(禮安 縣監)이 되었는데 청렴(淸廉), 명백(明白), 공정(公正) 정직(正直)으로 백성을 다스렸다.
예안 현감(禮安 縣監)으로 있는 동안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문하(門下)에서 종유(從遊)하였으며, 월천 조목(月川 趙穆) 후주당 김부필(後周堂 金富弼), 면진재 김응훈(勉進齋 琴應壎), 성재 금란수(惺齋 琴蘭秀) 등 제현(諸賢)과 함께 역동서원(易東書院)을 창건(創建)하였으며, 그 전말(顚末)은 퇴계의 역동서원기(易東書院記)에 자세하다.
1568년(宣祖 1)에 중훈대부(中訓大夫) 행함양군수(行咸陽郡守) 진주진관병마동첨절제사 겸춘추관편수관(晋州鎭管兵馬同僉節制使 兼春秋館編修官)을 지냈으며, 이듬해 1569년(宣祖 2) 순찰사(巡察使)의 차원(差員)으로 삼가현(三嘉縣)에 이르렀다가 불행히도 병을 얻어 강사(强仕)를 일기(一期)로 졸서(卒逝)하였다.
1859년(哲宗 10)에 현풍 이양서원(玄風 尼陽書院)에 제향하였다.
□ 곽 율 (郭 율) : 字는 태정(泰靜)이요 號는 예곡(禮谷)이며, 청백리 휘 안방(淸白吏 諱 安邦)의 현손(玄孫)이다. * (율=走+日)
1531년(中宗 辛卯) 10월 14일 참봉 휘 지인(參奉 諱 之仁)의 삼자(三子)로 출생했다.
일찍이 남명 조식(南冥 曺植)의 고제(高弟)로 학문이 높았으며, 무오(戊午)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다. 한강 정구(寒岡 鄭逑), 낙천 배신(洛川 裵紳), 동강 김우옹(東岡 金宇顒), 대암 박성(大庵 朴惺) 등과 교유(交遊)하였다.
관직은 홍산 현감(鴻山 縣監), 군자감 판관(軍資監 判官), 예천 군수(醴泉 郡守)를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勃發)하자 합천(陜川)에서 창의(倡義)하였으며, 그해 6월 초계가수(草溪假守=임시군수)로 부임하여 낙동강에 배로 침입하는 적을 수차에 걸쳐 공격, 토적(討賊)하였으며, 고령(高靈), 성주(星州), 무계(茂溪)에 영병(領兵)하는 등 강우보전(江右保全)에 지대한 공을 세워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에 제수되었다.
그해 9월 초계군수(草溪郡守)로 유임되어 국가의 변란(變亂) 속에 순국(殉國)할 결의를 굳혀서 충의로써 군민을 격려하고, 군의 동병(動兵)과 조련(調練) 등 전수준비(戰守準備)에 진력하였으며, 전쟁의 와중(渦中)에도 민생안정에 극진하여 학봉 김성일(鶴峰 金誠一)초유사(招諭使)가 지극히 존경하여 이르기를 “만약 열군(列郡)이 모두 초계와 같이 충성을 다한다면 백성의 소복(蘇復)과 국가의 중흥(中興)을 어찌 근심하리오”라 하였다. 이듬해 1593년(癸巳) 4월13일 난중(亂中)에 63歲로 졸(卒)했다.
그는 포산오현(苞山五賢)의 한사람으로 일컬었으며, 1695년(肅宗 乙亥)에 도동서원 별사(道東書院 別祠)에 제향하였다. 중폐(中廢)후 1990년(庚午)에 구지(求智) 화산서원(花山書院)에 제향하였다.
□ 곽 준 (郭 䞭) : 字는 양정(養靜)이요, 號는 존재(存齋)이며, 시호(諡號)는 충렬(忠烈)이다. 청백리 휘 안방(淸白吏 諱 安邦)의 현손(玄孫)으로 휘 지완(諱 之完)의 차자(次子)이다. 1551년(明宗 辛亥)에 출생하고 1597년(宣祖 丁酉)에 졸(卒)하였다.
일찍이 낙천 배신(洛川 裵紳) 문하에서 대암 박성(大庵 朴惺), 괴헌 휘 재겸(槐軒 諱 再謙)과 같이 수학(受學)하고, 뒤에 한강 정구(寒岡 鄭逑)에 사사(師事)하였다.
송암 김면(松庵 金沔)과 친교(親交)가 돈독했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勃發)하자 의병대장 김면(義兵大將 金沔)의 군막(軍幕)으로 들어가 참모(參謀)로 활약이 컸으며, 거창(居昌) 등지에서 왜적과 혈전을 전개하였다.
1593년(癸巳) 3월 의병대장(松庵 金沔)이 병사(病死)하자난중에 장례를 정중히 치른 후 의병(義兵)을 독려(督勵)하여 왜적을 방어하는데 혼신(渾身)의 힘을 기울였다.
1594년(甲午) 봄에 순찰사(巡察使)가 계청(啓請)하여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에 제수되고, 둔전차사(屯田差使)를 겸하였으며, 둔전(屯田)을 잘 관리하여 부족한 군량(軍糧)을 보급하는데 공(功)을 세웠다.
1594년 9월에 안의현감(安義縣監)이 되어 왜적의 호남(湖南) 진출을 막기 위하여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사수하는 중책을 맡았으며, 1597년(丁酉) 체찰사 이원익(體察使 李元翼)이 그의 현철함을 왕께 계달(啓達)하여 삼읍군(三邑軍)의 수령(首領)이 되었다.
그해 8월 정유재란(丁酉再亂)을 맞아 황석산성(黃石山城)에서 전 함양군수(咸陽郡守) 대소헌 조종도(大笑軒 趙宗道)와 더불어 가등청정(加藤淸正)의 왜적 대군과 맞서 분전(奮戰)하다가 중과부적(衆寡不敵)하여 성(城)이 함락됨에 순절(殉節)하였으며, 그의 두 아들(=履常, 履厚)과 자부(子婦=居昌愼氏), 출가한 여식(女息=柳文虎의 妻)이 일시 병사(並死)하니 일문삼강(一門三綱)의 정려(旌閭)가 내렸다.
뒤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고, 유가(瑜伽)의 예연서원(禮淵書院)과 안의(安義) 황암사(黃巖祠)에 제향(祭享)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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